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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目天戀瀟瀟雨
만목천련소소우 : 눈에 차는 하늘을 그리워하자 쓸쓸한 비가 내리다
장주의 일이란 그렇다. 백인의 약점을 쥐고 천인의 강점을 외운다. 만인의 흉을 잡고 일문의 길을 논할 수 있을 때에야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는 자리다. 즉슨 연가장주 연이결의 불면이란 당연히, 잦은 일이었다.
그러니 세월이 흐르기는 하였다, 고 볕을 등지고 앉은 사내는 생각했다. 장주의 침대와 거기 고이 놓인 얼굴을 보며 우두커니 서서.
— 네가 나를 곁에 두고 눈을 편히 다 감는구나.
사물들은 나란히 정렬되어 지는 해의 볕 아래 빛으로 된 실선을 품고 있었다. 눈 감은 이에게도 빛줄기 닿기가 예외는 아니라, 겉을 따라 그려지는 옅은 선이 연가장주를 평소보다 더욱 주변과 유리시키고 있었다. 고유의 색은 평상시에도 사내의 낯을 찬란하게 하곤 했었는데, 오늘따라 더욱 이질적으로 보이게 됐다. 그 낯을 앞에 두고 사내는 아무 말도 하기가 싫었다. 하지 못했다. 도착을 알릴 생각도 않은 채 그대로 서 있길 오래, 들썩, 하고 가는 실선 하나가 둔중하게 빛을 들어올렸다. 감도는 물기.
사내는 몇 발짝 걸음을 옮긴다.
창을 등지고 서자 그늘이 드리운다. 만들어낸 응달로 침잠하자 찡그렸던 눈가가 바로 펴진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잡아끄는, 가벼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물어왔다.
“부러 볕을 등진 것이냐? 간만에 해가 떴는데.”
사내는 여전히 답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해가 떴는데 그저 당신이 일어나지 않아 죄 놓쳤을 뿐이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연낙원.”
흰 손끝이 걸상을 가리켰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안에 단단한 심지를 품고 있어서, 거역하기도 싫게 되는 것이다. 원은 그저 걸상을 끌어와 서 있던 곳과 같은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응달의 수위가 낮아지고, 반쯤 비껴간 그늘이 불투명한 선이 되어 장주의 이마 위로 늘어진다. 다시 분리되는 세상.
“오랜만에 쬐는 해인데, 그걸 또 방해하는군.”
농이었으나 받을 수 없었다. 그 볕이 당신과 세상 사이의 간격을 만든다고, 그러나, 그래서, 해가 지고 세상의 선이 흐려지면 당신마저 옅게 화해 버리리란 기이한 생각이 드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끝내 말하지 못한다.
“시킨 일이 있었지.”
길어지는 침묵에 결국 먼저 입을 열며, 이결은 생각했다. 이 사내에게 나는 과연 몹쓸 짓을 하는 것이 맞다.
“마무리는…”
“했지요.”
낮은 대답이 돌아오자 이결로서는 더 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더 추궁할 것이 있었는데, 장주가 고민에 잠기려던 때.
“기억해?”
툭 튀어나간 소리는 원의 충동이었다. 후회되지는 않았다. 이결은 알아들었다.
“무엇을.”
그러나 잠시 회피했다.
“필요로 할 때… 오라 했던 것.”
원은 강경했다. 그 태도에 잇새로 한숨이 다 흘러나왔다. 말라가는 속에서 건조한 숨이 빠져나가자 즉시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결은 뜨끈해지는 목을 옅은 기침으로 다잡아내고 대답했다.
“가진 것이 이제 꽤 있지 않으냐.”
“적게 받지는 않았지.”
“그런데도.”
“그런데도, 약조는 약조인 것, 아닌가.”
해를 등진 사내의 표정이 잘 읽히지 않아, 이결의 투명한 눈가가 다시 얼핏 구겨졌으나 곧 평온을 되찾는다. 그래, 언제는 저 가려진 낯의 내심을 어디 들여다볼 수 있었던가. 다만 여태껏 그래왔듯 짐작했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내음이 섞여들기 시작했으나, 한결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내 보기엔 그것으로, 너나 나의 생각보다도 네 오래 살 성 싶은데.”
“어련히 옳은 말씀만 하시려고.”
아, 웃는구나.
시야 안에 들어차는 흐린 기운을 몇 번의 눈 깜빡임으로 몰아내며, 이결은 사내의 비틀린 입매가 부드럽게 벌어지는 것을 마저 응시한다.
“나는 내가 알지. 이토록 나약한 것을. 때로 나의 벗들은 나를 치켜세워준다만, 기실 아닌 것도.”
“세월을 그만치 흘려놓고 겁부터 내긴. 네 그림자 크기가 이만큼 자랐,”
말은 간간이 기침에 가로막혔다. 원이 급히 몸을 기울였다. 볕이 그림자를 살라 먹고 얼굴 위로 쏟아져서, 결은 다시 눈을 감았다. 태양이 남긴 빛이 그새 눈꺼풀 안쪽에 상흔을 만들었다. 따뜻했다.
정오가 지났구나, 조간인 줄 알았는데…….
원의 손이 이부자락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이 감은 눈 너머의 기척으로 느껴졌다.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그 영민한 머리로 알고 있을테다. 의원에게도 답을 묻지 못하는 쇠약임을.
“……괜찮다.”
이결이 속삭였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맡 근처를 맴돌다 채 닿지 못한채 떨어져갔다.
“그래도 아직 내 끝 날이 요원하니, 그래, 네 말대로 나는…… 내가 알지 않겠어. 그때까진 네 날도 남았구나.”
떨어진 손길 대신, 원의 응시가 새카맣게 닿아왔다. 이결의 피로를 읽어내린 시선이 손을 뻗어 침구 끝을 가만 만지작대다가, 구겨진 부분을 하나씩 펴 갔다.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내는 작은 부스럭 소리가 잠결을 불러와, 이결은 깨어난 지 얼마가 되었다고 도로 무거워지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려야만 했다.
“그래도 말야, 약조한 것이야.”
약조란 단어를 담은 목소리는 꼭 일의 경과롤 보고하는 듯 단조로운 어조로, 당연히 되새겨야 할 중책처럼 그 단어를 발음했다.
“내일 오면 답하마.”
대답은 거의 놀림과 같았다. 농이 잦지 않은 이의 완곡한 축객령이었으나, 꿈쩍도 않는 몸을 애써 바라보던 이결이 작게 또 한숨을 내쉬었다.
“……곧장 받잡지 않는 건 여전해.”
알아서 하란 신호였으므로 원은 자세를 유지했다. 몸을 침상에 기울이고 그 옆 협탁에 올린 팔로 턱을 괴었다.
속절없이 다가오는 수마의 끌어당김에 병자는 저항하지 못하고, 드러났던 눈 위로 다시 그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 이결은 입술을 달싹이고자 했다. 이미 가라앉아가는 몸으로 하지 못해 그저 애꿎은 이만 질근 무는 꼴이 되었지만, 그래, 내일은……
이 눈가림이 기꺼웠다고 해야겠다. 미안하다고도. 인제 그만 연가장에 죽 머무르라 이를까, 그 별채를…….
적막.
공중에 떠돌던 먼지마저 다 가라앉는 시간이 흐른다.
순식간에 잠들고 만 낯을 내려다보며 원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쫓기는 역할은 늘 내 것인줄로만 알았는데, 너는 무엇에 쫓기는 중인가?
그는 언제나 이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언어로 정리할 수 없어 느낌에 급급해오기만 했더니, 어느샌가 정말이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답해줄 텐데. 이 사내라면 분명 정답을 내려주기에 서슴없을 텐데. 그래, 원이 지금으로부터 두어살만 어렸더래도 바싹 붙어 깨워내 물었으리라. 금빛 동공 안으로 비치는 제 그림자를 추궁했겠지만, 지금은.
다만 아무 말 않고 이 곁에 있고만 싶었다. 숨이 아주 가늘어질 때까지. 그의 숨 아닌 자신의 숨이 옅고 또 옅어져서, 하나의 빛줄기로 화해 그 선을 짙게 덧그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아, 세월이 흐르기는 하였다, 정말로.
해가 진다.
원은 화들짝 일어났다. 정말로 지켜보다 잠이 들고 말았다. 느슨해진 것이 연가 장주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실없는 웃음이 흐르는데,
“…….”
잠든 이의 눈가가 걸상이 바닥에 끌리는 큰 소리에도 한 번 움찔하지를 않았다.
“장주.”
“…….”
“연이결.”
예민한 청각이 환자답지 않게, 아직도 거친 산세 안의 짐승인 양 치부를 감추듯 조용히 내리깔린 숨소리를 마침내 잡아챈 뒤에도 원은 얼어붙은 채 눈앞의 사람을 주시했다. 그 가슴팍이 한 번 들썩이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그제야 원은 반쯤 안도하여 말했다. 겉 아닌 속으로. 음성이나 그 외의 것으로 거리낌없이 그를 안식에서 깨워 건져내던 지난 날과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 이결아.
사실 그는 그 호칭을 꺼리던 때도 있었다. 장주, 그렇게 부르는 일. 때로는 한 뼘의 거리가 벌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렸다.
— 나는 그대가……
살수를 옆에 두고 굳게 다물린 눈꺼풀. 아, 더럭 겁이 났다. 사내는 속엣말도 마저 잇지 못한채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빈 의자 위로 떠난 그림자 대신 달빛만이 켜켜이 가라앉아간다.
방을 뛰쳐나온 것이 무색하게 막 장지문을 나서던 원은, 돌아가려던 걸음을 바꾸어 우뚝 섰다. 살수, 그래. 감히 아무개가 밟지 못할 장안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시간은 흐르는 것. 저까지 서 있는다고 달라질 일 역시 없지 않은가. 다시 한 번 해 떨어질 때 돌아와 듣기로 한 대답이 있으니……, 정시에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멋대로 정리한 생각 끝에 원은 그대로 문 앞에서 새벽을 났다. 팔짱을 끼고 처마 아래에 기댄 채 간혹 드나드는 시비의 기척을 무시했다. 밤에도 그늘이 있다. 그 장막마저 걷히고, 발치에 새벽의 어스름한 빛이 돌 때야 고요함에 안심하여 떠났다.
그 새벽에 연가장주 流星 건호, 자 이결이 등선한다. 조의 弔意 .
소식을 연가 가솔 似歡劍 낙원이 들은 것은 다시 오후, 그 장지문 앞에서였다. 그는 길 위를 걸어오는 동안 사위가 고요할 정도로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곧 비가 오리라 짐작했다. 더위가 쓸려나간 자리에는 으레 소낙비 잦게 내리던 계절이었다. 걱정 많은 시비들 몰래 기분이나 내자는 뇌물로, 소매에는 부뚜막에 들러 얻은 간식과 물 타 희석한 연화주 병을 숨겨 왔다.
“그렇군.”
그 교 출신 사람들의 어떤, 남모를 유대를 아는 시비들이 눈치를 보다 그에게 방 안에 들어 배웅하시겠느냔 의사를 물어왔다. 원은 고개를 저었다. 보지 않고 떠났다. 모여선 시비들의 어깨 너머, 그 열린 방문 안으로 한 발짝만 디뎌도,
보게 되리라. 거기 빛이 그리던 흰 선이 온데간데없이 흔적도 남지 않았으리란 사실을, 이 눈으로…….
아,
— 속았구나.
마지막 말이 정말이지 가벼워서 내가 몰랐구나. 이미 내일이 멈춰선 자리 앞에 서 있던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기다렸다. 속아서. 그래, 맞아.
— 연가장주라면 타산을 맞출 줄 알아야지. 내 생애 내내 너를 배신해왔으니, 한 번 쯤 네가 배신하는 날도 있어야 수지에 맞겠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다. 정말이지 옳은 일이야. 헌데……
발걸음이 멎는다. 그는 자신의 걸음에 더는 정처 없음을 깨닫는다. 아무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는 연가의 낙원이었다. 그렇게 삼은 이 없이는, 어느 갈랫길이 옳고, 어떤 끝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허, 성마른 입술이 헛숨을 뱉고 길게 비틀린다. 머리 위로 쨍하던 볕이 수그러들고 있었다. 먹운이 내린다.
— 헌데, 이리 한 품에 돌려주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그래, 영……
그림자가 바로 선다.
— 영 아프구나.
다시 뻗어나가는 걸음이 거침없이 향한 곳은 장주가 그의 가솔에게 늘 내어주던 별채다. 전날 장지문 앞에 서 있을 것이 아니라 묵었어야 했던 곳이며, 장주의 침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기둥에는 제비 문양이 새겨져 있고, 문고리에도 날개깃이 보인다. 창을 밀어 열면 뒤로는 연못이 있다. 잉어가 두 마리 산다. 먹이를 던지면 물 채워진 크기만큼 끝도 없이 자라날 생물이 사는 곳에 간혹 엽전 따위를 던지며 무료함을 달랠 때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계절엔 때로 단풍이 바람결을 타고 흘러들어와 창가의 다탁 위를 흩날리곤 했다. 이런, 나만 당할 순 없지, 같은 말로 찻잔 위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 장주가 해결해야 할 일이 빼곡히 적혀 있던 서한에 올려 두면, 연한 한숨으로 이루어진 사내가,
……가볍게도 제 손과 낙엽을 떼어내며 미소 짓던 장소다. 일개 살수에게는 과분한 처소였다.
바로 그 다탁 앞에 도착하여 이제 더는 누가 앉을 일 없는 걸상을 반대편에 둔다. 홀로 앉은 원은 숨겨뒀던 물건들을 찬찬히 올렸다. 마개 딸 일이 영영 사라진 연화주 병의 둥근 모양 위로 빛이 돈다.
빈 잔에 차오르는 것이 오로지 원이다.
연가의 다과는 과히 맛이 있다고 했다. 그의 무감한 혀로는 느끼기 어려운 기쁨을 가만히 베어문 이의 표정이 어땠더라. 세월만큼 무서운 것이 습관이다. 탁자에 올려둔 당과의 종류는 죄 그가 외우고 있는 이결의 취향이나 다름없었다. 으레 들여오면 그대로 삼켜내주던 이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침잠해가던 심상을 깨웠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문전에 서 있던 것은 이결의 시비다. 내밀고 있는 목함 뚜껑이 반들했다.
“무어라 이르시던?”
“그것은 소인도 달리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래…….”
제 주인을 닮았는지 시비조차 지독하게 설명이 없다. 고개를 숙이고 물러간 시비를 뒤로한 채 건네받은 목함을 빈 술잔 옆에 내려놓은 원은 잠금쇠를 손끝으로 한참 문질렀다. 거기에,
所願
으로 새겨진 각인이 있다. 짓눌린 손끝이 파인 결대로 갈라진다.
지금은 아니다.
그는 다탁 위의 정물을 그대로 두고 벌떡 일어난다. 지금은 아니야. 목함을 등지고 그대로 침상에 눕는다. 모든 것이 식어가는 동안 원은 두문불출하였다. 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권태가 발목을 잡고 기어올랐다. 그에 감응한 시간이 얼어붙어만 갔다.
그동안 목함 뚜껑은 열린 창으로 볕을 맞이했다. 비를 맞았고, 낙엽 하나가 잠금쇠를 어루만지고 지나는 동안 장례가 치뤄졌다. 창 밖의 달이 완전히 기울도록 날을 꽉 채운 송별이 지나간다. 원은 계절을 맞는 나무보다도 의복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본래 그림자였으니.
장주의 시신이 장안을 떠난다. 어느 양지에 묻히리라. 혼백이 떠나도록 직접 가른 시체가 손에 다 꼽을 수 없으면서, 살수는 다만 죽음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배웅을 마친 가솔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다만 그 모양을 모두 지켜본다. 창틀 너머로, 문 너머로, 담 너머 지나는…….
내일은 날이 완전히 식으리라,
하늘이 처마 끝까지 내려앉은 것을 보며 원은 생각했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탁자 위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이 비가 끝나면 계절이 완연히 바뀌리란 예감이 들었다. 시선이 비를 따라 목함 위로 떨어진다. 고조곤히 고막을 두드려오는 소리.
때를 직감한다.
차갑게 식은 쇠로 옮아가는 온기. 덕분에 새겨진 각인마저 다 미지근해질 때 원은 만지던 잠금쇠를 꺾어 열었다. 시선에 가장 먼저 스친 종이를 집어든다. 곱게 접힌 모양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피어난다. 호흡이 일순 멈칫한다,
직선이 아는 서체를 품고 바르게 뻗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 묻지 못한 것에도 늘 답을 주는 사내가 있다.
— 무엇인지는 네가 잘 알겠지.
아니, 그는 이제사 알게 되었다.
— 선택에 등 밀어주지 못하는 것은 아쉽구나, 다만 이리……
제 상태에 대한 해명은 상실이 아니었다.
— 내 없을 때의 방책도 마련해두고 가니, 너무 원망 말아라.
상사로군. 손가락만 한 병의 매끈한 표면을 손바닥 위로 굴리며, 종이 위로 들이치는 빗방울에 흩어지는 먹을 본다. 곧은 선이 흐리게 번져간다. 시선을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잔인하기는.”
빗소리 사이로 흩어지는 말. 일전까지 뜯을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연화주 마개를 연다. 차오르는 것은 축배라고 하자. 먼저 간 이에게 술을 올리는 것이 예의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장주의 말대로라면 그는 가르침을 충분히 잘 이행하는 사내였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손 안의 병도 마저 연다. 탁자 위에 올려둔 술잔의 달큰한 내음 사이로 스며드는 산패한 독기는 이토록 작은 병 하나로 낼 수 없을 것처럼 지독했다. 병과 잔이 마주친다. 맑은 소리.
마침내 한 사내의 책임이 혀끝으로 떨어진다. 그리하야 자신이 자신의 임무를 사하는 일이다. 이것은 이 살수 생 최후의 의뢰로, 해 오던 일에 비해서, 어찌 쉽지 아니하겠나.
사해 死海 로 발을 내디딘다. 한 줌 미련 없이.
고통은 새삼 훌륭한 자각제로, 원은 격통 안에서 흔들리는 자신이 다시 일엽편주와 같은 모습이 되었음을 본다. 파도가 치는대로 흔들리고, 또 흔들리다 부서지겠지, 산산이 조각나고 파편 되어,
가라앉겠지.
좇던 것이 이 파도에서 저를 매어두는 닻임을 진작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훨씬 전부터 나는……
네 증오로라도 존재하고 싶었다, 너는 미련으로라도 나를 품었으면 좋겠다, 닻줄이 아무리 연하다 한들 끊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 거였다, 다른 이치란 필요 없었어, 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그래,
네게서부터였으므로…….
네가 나를 끝까지 인간으로 있게 하는구나.
때늦은 깨달음과 함께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하나의 물살이가 되어, 빗물 사이로 스며드는 이의 귓가로 빗소리 흐르다, 멎는다.
하늘이 갠 뒤는 적막이었다. 마침내 만개한 동공 안으로 푸른 빛이 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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